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리코의 전투 (문단 편집) === 전투의 의의 === 예리코 전투 이전 [[아브라함]] 시대는 어디까지나 유목민이 이 지역을 배회하면서 거주한 것이지 가나안을 통치하는 정치체를 구축했다고 보긴 힘들다. 아브라함 시절의 근동은 아직 부족 사회였다. 그 당시에 제대로 국가라고 불릴만한 건 지중해 해안 쪽의 팔레스타인 도시국가들과 고대 이집트가 전부였으므로 가나안 지방엔 확실하게 자기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세력이 없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터를 잡긴 했지만, 흉년 때 곡식을 얻으러 이집트로 내려갔다는 성경의 기록도 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사료적 증명이 되는 예리코 전투 이후와 달리 이집트 이전 시대의 행적은 나중에 가나안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꿰어맞춘 전설에 가깝다는 소수의 견해도 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유대인들의 조상 히브리인들은 어떤 도시에도 정착하지 못한 [[이집트]] 출신 난민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를 통해 가나안 주민들로부터 예리코를 강탈함으로써 히브리인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의 땅을 갖게 되었다. 예리코 자체가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 길목에 놓인 요충지로서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도시들에 맞먹을 정도로 오래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가 불탄 곳이라는 점을 들어 이렇듯 처참한 사건은 예정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고대의 일이었다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엄연히 침략에 전쟁 범죄를 저지른 셈이며, 그것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이 있다. 그 비판을 하는 이들이 소속된 나라 역시 씨족, 부족 국가 간의 전쟁을 통해서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걸 신의 뜻이라며 정당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위의 의미부여는 일종의 상징적 해석과 의미 부여에 가깝다. 때문에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이 사건을 현대 팔레스타인 분쟁과 연계하는 것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단 당시의 가나안 토착 세력과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 거주 아랍인들 간의 접점이나 계승 관계는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전혀 없다. 양자는 '''히브리 민족과 대립했다'''는 측면에서만 공통점을 가질 뿐이다. 당시의 가나안 토착 세력은 이후 수백 년에 걸쳐서 히브리 민족과 융합되어서 소멸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